북한인권 이제는 말해야 한다 - 북한 여성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최진이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최진이 씨는 1999년 탈북해 남한에서 문학과 여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조선작가동맹 소속의 시인이었다. 이 글은 북한여성문제에 대해 남한 혹은 서구의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서술했다기보다는, 최진이 씨 개인이 탈북한 북한여성이자 지식인으로서 느꼈던 바를 솔직하게 적은 글이다. 본문의 북한인명은 편의상 존칭 및 직함을 생략해 표기하였다.(편집자)
북한의 여성은 집 밖에서는 나라의 두 수레바퀴 중 하나를 떠밀어 나가야 하고 집 안에서는 가사, 자녀양육, 시부모 부양 등 가정경영 일체를 도맡아해 나가야 하는 슈퍼맨 같은 존재이다. 북한의 여성문제는 국가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여성차별을 깨달은 선각자 중심으로 발전되었다기보다, 최고 권력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온 '권력의 시녀'적 성격이 컸다.
북한 여성문제의 정치화 과정
북한 여성동맹은 북조선 근로단체로써는 최초로 조선공산당 창건 한 달 후인 1945년 11월 18일에 조직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소련군의 후광 속에 9월 21일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10월 10일 조선공산당을 창건하였다.
김일성이 여성동맹조직을 이처럼 서두른 데는 이유가 있다. 북한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한 빨치산 출신 중심 공산당세력은 조직의 순수성을 운운하며 대중을 포섭하지 않은 결과, 타 세력에 함몰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 위급한 정황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다른 정치 세력이 미처 눈길을 돌리지 않은 미비한 여성일반을 주시하도록 하였고, 공산당 지지 확률이 가장 높은 독립변수로 포착하도록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선에서 성한 몸으로 돌아온 남자들은 많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전쟁히스테리 환자들, 부상자들, 전사자들…. 이들로 인한 전후 인민경제건설의 인력 공백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북한이 다시 일어서자면 어떤 획기적인 응집력이 필요했다. 김일성은 1958년 7월 19일 내각결정 84호 '인민경제 각 부문에 여성들을 인입시킬 데 대하여'를 채택하였다. 여성들을 사회사업에 동원시켜 전후복구건설의 다급한 인력 공백을 메우라는 것이 기본요지였다.
뒤이어 1966년 10월에는 전국 보양원 대회를 열어 여성인력을 보다 효율화 할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인 탁아정책을 토의하였다(북한의 탁아 보육제도는 역시 구소련의 경험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건국사상 대 개조운동'을 벌여 발상으로 당시 거리에 만연하던 주점 종사자, 성매매 여성 등 숱한 '비 사회주의적' 여성들을 사회주의 건설에 깡그리 끌어들였다.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이 경제적 침체기에 처하자 정부는 여성문제를 또 한 번 정치화하였는데 1990년 새로 제정한 가정법에서 가정부양 의무자를 가족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이는 가정부양 의무자를 국가로 설정했던 종전의 법으로부터 국가의 전면 도피를 의미했다. 국가가 자기의 짐을 '가족'의 이름 하에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넘겨 씌워버린 것이었다.
지도자 가문에 따라 부침한 북한 여성문제
북의 여성문제에서 또 하나의 특징이 북한여성문제가 김일성 가문과 예민하면서도 구체적인 연관관계에 있다는 데 있다. 북한에서 여성문제는 곧 김일성 부인들의 문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북한은 김일성의 부인 역할에 온갖 의미를 부여해왔다. 북한 가부장제사회에서 김일성 권력의 강화는 김일성 부인의 권력화를 동반했고, 그것은 곧 북한여성문제의 당당한 쟁점화로 이어졌다. 김일성의 부인이 관여하지 않은 북한 여성사는 북한 역사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북한 여맹 대회일지를 보면 조선중앙연감에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으로 있지 않았던 북조선민주여성동맹 1차 대회와 2차 대회는 명시조차 되어 있지 않다.
북한 중앙연감 여맹일지는 김일성 부인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으로 선거되어 사회활동을 개시한 여맹 3차대회시기부터 그 기록을 시작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대회 역사를 보면 여성문제를 기본과업의 하나로까지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대회는 김성애가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열렸던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 뿐이다. 5차대회 보고문에는 도시 여성들을 위해 부식물가공품의 공업화를 실현하고 전기 밥가마, 냉장고, 세탁기 등을 대대적으로 생산하여 가정들에 공급해줄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북한 내부 여성들 속에서는 당 제5차대회가 제시한 여성문제는 김성애가 건의한 것의 반영물이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상한 이후 김일성의 권력은 아들 김정일 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연히 북한여성 문제는 그 위력을 상실해갔다. 북한의 '신 권력실세' 김정일의 등장이 김일성 부인 김성애(편집자 주 :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은 1949년에 사망)의 역할을 제한함으로써 가능했다는 북한정부의 내부 사정은, 김성애의 후광 속에 있던 북한여성문제를 폐기 상태에 처하게 했던 것이다.
북한의 의식 있는 여성들은 북의 여성문제를 복귀시킬 수 있는 인물로서 김정일의 누이동생 김경희를 지목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여성문제에 손을 대지 않아 실망을 자아냈다. 이처럼 북한여성문제는 김일성 가에 장악됨으로써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였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북한의 가부장제 통념이 여성문제에 미친 영향
북한 여성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직업 운'을 타고 나온다. 중학교 졸업 후 6개월 이상 무직인 자는 법적 제재를 받도록 하는 엄격한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모든 업종에 급수제가 존재하는데 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봐서 이에 통과되는 자의 임금만을 올려주는 장치가 있다. 가부장적 통념은 바로 이 틈새를 공략한다. 즉 통과자를 남성 위주로 하며 높은 급수에 올라갈수록 여성을 배제시킨다. 또한 간부선출의 기회도 남성에게 대부분 부여함으로써 간부에게 해당되는 고임금과 국가적 혜택이 그들에게 집중되게 한다. 육체적 노동을 요하며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인식된 분야들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위주로 배치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소외를 부채질한다.
주택도 결혼한 남성에게 군(구역) 주택 배정과에서 할당하도록 함으로써 여성이 인간의 원초적 안정을 추구하는 요람을 가질 권리를 상실케 하였다. 여성의 직업을 남편의 거주지 내에서 얻도록 함으로써 여성의 다양한 권리를 차단시킨다. 각 대학 입학 비율도 여성을 남성에 비해 평균 30% 이하로 한정시켜 여성들의 대학 진학을 제한시킨다.
사무직들에서 1~2년 간격으로 진행되는 해고 비율을 여성 쪽에 높게 둠으로써 여성들이 불이익을 우선 당하게 한다. 이혼녀,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질시와 이혼에 대한 법적 통제는 여성의 피해율을 한층 증가시킨다.
북한 여성의 섹슈얼리티
북한은 일찍부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장려한 결과 남녀 양성의 사회적 관계가 남한에 비해 원활한 편이다. 물론 아내와 부부로 명명되는 가정의 선에 들어서면 그 관계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확산되어 있는 양성간 친밀문화와 또 다른 요인들은 북한 사회인들의 성의식 형성에 개방적으로 작용해왔다. 그것이 나중에는 '타락'에 가까울 정도였는데 그 원인은 첫째로 북한이 식량난에 접어들면서 한 끼 밥을 위해 여성들이 자신의 성을 제공할 정도로 사회의 물질적 기반이 약해진데 있다.
다음으로 생활난 이전 북한 지식인 계층 속에 만연되어오던 개방적 성 의식은 북한 독재 체제에 대한 카타르시스의 출구로 짚어 볼 수 있다. 성 문제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성폭력, 성 희롱문제이다. 북한에서 성폭력이나 성희롱은 ‘운명의 도약’을 원하는 여성들 거의가 예외 없이 통과해야 하는 블랙홀이다.
북한에서 성희롱이나 성폭력은 언어화 되어있지 않고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지도도 아주 취약한 편이다. 따라서 성에 대해 일정한 의식이 있는 여성들조차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일종의 도약 발판으로 삼을 뿐 반항을 하거나 법적 소송을 걸지 못한다.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법이 부재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결혼한 여자는 첫 자식으로서 아들을 못 낳으면 발언권이 안 섰다. 1980년대 중반기부터 여성들 속에서 남아 선호 사상에 대한 자연 발생적 저항 의식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대접'의 차원을 지나 아예 아들을 반대하는 추세였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북한 경제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자식을 한 명만 요구하는 가정이 부쩍 늘었는데 그런 경우 첫 자식이 딸이어도 무방했다. 오히려 아들만 낳은 여성을 오갈 데 없는 '국제 고아'라고 비아냥거렸다. 북한에서 아들 선호도가 줄어든 결정적 이유는 남성을 거쳐 분배되는 사회적 부가 고갈되어 버린 데 있다.
'남남 북녀'의 허구성
'남남북녀' 담론은 처음엔 특정집단(남쪽의 남자와 북쪽의 여자)의 미적 자질에 대한 일반화라기보다 위치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진 듯 싶다. 큰 고분 발굴 시, 왕과 왕비로 추정되는 남녀의 위치가 전자는 남쪽, 후자는 북쪽에 있었고 견우 직녀성의 위치도 남성성을 상징하는 견우성은 남쪽에, 여성성을 상징하는 직녀성은 북쪽에 있다는 관찰(별들에 성별의 위치가 바꾸어져 명명되었을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들은 남남북녀 담론이 그 시초에는 지금과 다른 의미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8.15 해방을 전후로 신체적 크기 내지 생활력의 의미만이 있던 '남남북녀' 담론은 분단이 고착되되면서 북한에서 먼저 '미인'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것도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고 이쪽 특정 인물들의 방북이 활성화되는 시기부터였다. 인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 사고방식이 '남남북녀'라는 매개체를 통해 북한에 스며든 것이었다. 1980년~1990년대에 남한에서 문득문득 풍겨오는 '남남북녀'의 '북녀' 이미지는 뭔가 달랐다. '화합' '친화'와 같은 동포애 적 의미가 그 말속에 물큰 배어있었다.
부산 아시안 게임과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표출된 한국남성들의 '북녀' 열기는 그 성격이 또 달랐다. 한국사회 지배집단의 '자기집단 애호'의 분위기가 보다 강했다. 한국사회의 급진적 경제발전과 페미니즘의식의 급성장으로 위기를 느낀 남한 남성 집단이 경쟁자집단(남한 여성 집단)을 부정할 필요가 생기자 북녀 응원단을 통하여 자기의 경쟁대상에 대한 간접부정을 표출한 것이었다. 이 말은 남한 남성 집단이 남한 여성을 간접 부정한 것 이상으로 북한 여성을 부정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남성들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북한 여성의 순종, 순결의 '미덕'까지 '남남북녀' 논의에 결부시켰다. 이 견해대로 본다면 북한사회에서 여성은 정조가 하나같이 순결하고 남성에게 덮어놓고 순종하는 풍조만이 만연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만일 북한이 정말로 순결, 순정, 때묻지 않은 여성의 고결함 등이 주요 문화코드로 작동하는 사회라면 여성들로 대규모 미인군단을 형성하여 동아시아 올림픽경기에 응원단으로 보내는, 즉 국가가 나서서 여성을 집단적으로 대상화하는 이런 집단 성폭력행위는 절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은 여성의 인격이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초보적 방법조차 개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남한에서 일정에 오르고 있는 성희롱, 성폭력과 같은 민감한 문제들은 남북 여성문제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데 대해 심사숙고하게 한다.
여성문제는 북한(김정일이 아닌)여성들과 눈높이 맞추는 입장에서 일상의 문제들을 들고 나와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안건 협상에서 특별한 대안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배제된 탓에 여성들끼리의 무리 없는 대화는 최소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것은 보다 성숙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단서가 되며 남북한 여성들이 서로를 이해 해 가는 귀중한 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