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현의 아시아 역사 문화기행 1 _ 어메이징 타일랜드, 그 섹스의 그늘 아래
유재현 소설가 _ 『창작과비평』 1992년 봄호에 중편소설 「구르는 돌」로 등단.
저서로는 『시하눅빌 스토리』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등이 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한반도에서 아시아는 희미하게 보일 뿐이라지만 천만에, 그마저 환시(幻視)이다. 경계의 피안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안개가 아니라 장벽이어서 우리는 희미하게라도 그 장벽 너머를 ‘볼’ 수가 없다. 오만과 무지, 편견과 몰이해라는 우리 안의 이 장벽을 허물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아시아인이 될 수 없는데 지금 이 시대, 세계화와 포스트식민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아시아인이 될 수 없다면 우린 누구인가? 남한족인가?
아시아는 지리가 아니라 역사이고 이념이다. 아시아가 태동한 근대 이후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아시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거칠고 비릿한 숨결을 내뿜어 왔다. 그 아시아는 말하기를 한반도 또한 아시아의 자식이라고 한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분방하게 시작한다.
88올림픽 직후인 1989년 특단의 조치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15년이 흘렀다. 지난해엔 7백86만 명의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갔다. 물 밖으로 나선 우리 동포들은 어디로 갔을까. 59%인 4백70만 명은 아시아로 향했다. 단순히 관광을 목적으로 한 3백41만 명으로 대상을 좁힌다면 그 비중은 더욱 커져 77%가 아시아를 택했다. 그 첫 번째 이유(또는 마지막 이유도)는 비용의 저렴함이지만 여하튼 지난 15년 동안 한국인들이 퍽도 부지런하게 아시아를 들락거렸음은 분명하다.
태국엔 이른바 ‘정조 관념’이 없다?
폭발적 증가세의 해외여행 붐은 예전의 일본과 닮은꼴이다. 일본은 1964년의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을 자유화했고 이후 일본 관광객들은 아시아 각지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갔다. 고도 경제성장과 엔(円)화의 위력을 앞세워 1970년대와 1980년대 아시아 각지를 휩쓸었던 일본인들의 해외여행에서 두드러졌던 것은 ‘섹스관광’이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은 ‘섹스애니멀’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칭을 국제적으로 얻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의 섹스관광처럼 크게, 그것도 국제적으로 불거진 적은 없지만 한국인들도 일본인 못지않게 ‘열심’인 것으로 보인다. 남녀 혼성의 일반 패키지 관광에서도 한국 남자들은 해가 지면 가이드를 앞장 세워 퇴폐 마사지업소나 이와 비슷한 곳을 찾아 나선다. “아내가 가방 안에 자신도 모르게 콘돔을 넣어두었다”며 으스대는 방콕의 한국인 ‘불출남’의 작태는 이제 ‘꼴값’ 축에도 끼지 못한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아시아의 섹스 관광지는 태국의 방콕이다. 태국은 연간 60여만 명의 한국인들이 찾는 관광지로 일본과 중국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섹스관광으로는 1위의 명성을 얻고 있다. 방콕의 성매매 업소들을 순회하는 한국의 남자들이 죄책감을 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태국 여자들에게는 정조관념이 없다. 태국에서는 누구도 몸 파는 여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네들은 모두 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전적으로 문화적인 차이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태국에서 몇 년씩 머물렀다는 한국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절로 동화되게 마련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남성들은 꺼림칙한 생각은 접어두고 불끈 하체에 힘부터 주고 현지 가이드에게 호기롭게 소리친다.
“갑시다.”
이제 남은 일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방콕의 ‘갈 곳’들을 향해 ‘태극기를 휘날리며’ 진군하는 일이다. 이제 그는 그 모든 장소에서 성매매에 대해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없게 되어버린 소녀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1천~2천 바트의 성매매를 거듭할수록 이른바 ‘문화적 차이’에 대한 경험적 확신의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문화적 차이’? 그러나 성매매는 태국에서 단 한 번도 합법화된 적이 없다. 성매매는 한국에서도 불법이지만 성매매 업소는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태국 또한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문화적 차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덧붙여 태국어에는 이런 단어들이 있다.
프징 마이디(나쁜 여자)와 프징 하킨(구걸하는 여자).
둘 모두 몸 파는 여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미국의 군화가 새긴 ‘아시아의 윤락갗
태국. 세계적인 관광대국의 반열에 올라 있는 나라. 2002년 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모두 1천80만 명으로 한국의 2배에 달했다. 관광객들은 평균 7~8일 동안 머물며 이들이 뿌린 돈은 3천2백30억 바트로 한화로는 1조 원에 가깝다. 그런데 태국의 관광지나 휴양지들이 이처럼 그득하게 관광객들을 담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태국이 아니더라도 아시아엔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절로 옷깃을 여미도록 하는 유적지들이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국은 어떻게 관광대국이 되었을까? 해답은 태국이 3S의 나라로 불리는 것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바다(Sea)와 태양(Sun) 그리고 섹스(Sex)를 의미하는 3S는 현실적으로 태국의 3대 관광자원이다. 들큰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섹스인데 1999년 이후 태국 정부가 몸소 이미지 쇄신에 나서고 있기는 하지만 태국은 여전히 ‘아시아의 창녀촌(Brothel of Asia)’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과 북미 그리고 중동과 아시아에서 태국으로 몰려드는 관광객 중 적잖은 수는 섹스 관광에 나선 남성들이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 중 남자의 절반 이상은 전적으로 또는 관광을 겸해 값싸고 부담 없는 섹스를 즐기기 위해서다.
그러나 태국이 처음부터 이런 섹스의 낙원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 낙원은 전쟁이라는 지옥의 끝자락에서 태어나 병사의 정액을 먹고 자란 낙원(?)이었다.
1962년 이후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본격적인 군사적 개입은 1964년 조작된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대규모 지상군이 파병되면서 전면적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이 전쟁에서 태국은 미군의 든든한 후방기지였다. 1950년대 이후 태국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과 함께 건설된 미군의 공군기지는 1969년과 1970년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후방기지로서 태국은 또한 미군의 대규모 알앤알(R&R, Rest and Relaxation, Recuperate, 휴식-오락-회복) 기지였다.
알앤알은 참전 미군에게 연차로 주어지는 일주일간의 공인된 휴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고 원기를 회복시킨 후 다시 전장에 투입하는 군사정책이었다. 예컨대 한국전쟁 당시 미국 본토에서 징집되어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군 병사들은 1년의 복무기간을 마치면 전역할 수 있었고 목숨을 부지하는 한 1회의 알앤알을 떠날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알앤알 기지로 사용된 나라는 일본이었고 도쿄가 주 무대였다. 한국전쟁에 동원된 모든 미군 병사들의 꿈은 도쿄로 떠날 때까지 살아 있는 것 그리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와 나머지 복무기간을 마치고 고향으로 살아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섹스머신들
아시아에서 미국의 첫 번째 전쟁의 알앤알 기지가 된 도쿄는 패전 후의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가운데 거리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들끓고 있었다. 1945년 맥아더의 미군정 시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이른바 엘비에스엠(LBSM, Little Brown Sex Machine, 귀여운 갈색 섹스 기계. 필리핀의 기지촌 성매매 종사자들에 붙인 미군의 별칭)은 한국전쟁의 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해 도쿄는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외국군 상대의 성매매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원동력은 미군의 알앤알 정책이었다. 당시 도쿄의 일면은 말론 브란도가 주연을 맡은 1957년의 영화 「사요나라(Sayonara)」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알앤알로 도쿄에 가게 된 미공군장교 브란도가 게이샤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는 「나비부인」의 아류인 이 영화는 한국전쟁에서의 알앤알을 극도로 미화시키고 있지만 결국 장교는 ‘고급 매춘부’와, 사병은 ‘저급 매춘부’와 ‘놀아났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1958년 미국 아카데미가 이 영화에 남우주연상을 비롯한 4개 부문의 상을 안긴 것은 알앤알에 대한 미국의 긍지와 전폭적 지지를 웅변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섹스의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알앤알의 아시아적 스탠더드를 완성시켰다. 사선(死線)에서 다시 사선으로 돌아가야 할 병사들에게 섹스는 미군 당국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알앤알이었다. ‘귀여운 섹스머신’들은 모두 황인종들이었고 병사들이 전선으로 돌아가 싸워야 할 적들 역시 황인종인 국(Gook, 황인종을 비하하는 미군의 속어. 한국전쟁 당시 국(國)에서 유래)이었다. 인종적 경멸, 남성의 섹스가 가지는 공격성, 전쟁이 안겨준 극단적인 긴장의 해소 등은 모두 미군이 원하는 것들이었다. 도쿄로 몰려간 미군 병사들은 아낌없이 군표와 달러(모두 미군의 국방예산이었다)를 거리의 여성들에게 뿌려댔다. 전선으로 돌아가야 할 병사들에게는 휴지일지도 모르는 군표와 달러는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패전 일본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울지언정 생존의 조건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군은 유럽에서 결코 이따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전국인 독일에서도 분명 미군을 상대하는 독일 여성들이 존재했지만 소수였다. 미군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를 지원하거나 고무하지도 않았다. 상황은 아시아로 무대가 바뀌자 돌변했다.
전쟁터인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선이 고착하면서 남한 후방의 도시 주변에서는 굶주림 끝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여성들이 등장했고 전쟁 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따른 미군의 항구적 주둔은 기지
주변에 작은 알앤알 촌들을 만들었다.
이렇게 미군의 알앤알은 수빅만에서 오키나와, 마닐라에서 도쿄와 서울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군사적 매춘 벨트를 완성시켰고 다음 차례는 방콕이었다.
베트남전의 알앤알 기지로 ‘개발’된 방콕
2차 인도차이나전쟁 초기 알앤알의 행선지는 여전히 도쿄이거나 혹은 다낭 인근의 차이나비치, 붕따우 등 남베트남의 해안 휴양지였다. 그러나 도쿄는 멀고 남베트남은 알앤알의 적지(適地)가 아니었다. 전쟁은 북위 17도선이 아니라 남베트남 전역에서 수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베트남의 알앤알 휴양지는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군은 지리적으로 인접했을 뿐 아니라 안전한 방콕으로 눈을 돌렸다. 방콕 수쿰윗의 윈저호텔에 미군의 공식적인 알앤알 센터가 자리잡기도 전에 미군은 방콕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민간부문에도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1970년대 미국의 체이스 맨하탄 은행이 태국 정부에 제공한 4백만 달러 상당의 대여금은 대부분 방콕의 호텔과 바, 레스토랑을 건설하는 데에 사용된 알앤알 자금이었다. 방콕과 유타포 미공군기지 사이의 어촌이었던 파타야 역시 이때부터 홍등가와 다름없는 미군의 알앤알 타운으로 급속하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965년부터 1973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70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에서 방콕으로 알앤알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자 방콕은 마닐라를 제치고 1위의 섹스관광도시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10여 년에 걸쳐 미군의 알앤알 기지로 복무한 대가였다. 그 기간 동안 공공연한 군사적 성매매를 위해 뿌려진 달러는 태국의 빈곤한 농촌 출신의 여성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방콕으로 빨아들였다. 1960년 2백63만 명이던 방콕의 인구가 1970년에 1.28배 이상인 3백38만 명으로 급증한 것은 태국이 여전히 농업국가로 산업화 전 단계였던 것을 고려하면 그 의미를 헤아리기가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로 일시에 공황에 직면하게 된 방콕의 군사적 성매매 인프라는 민간 인프라로 급속하게 전환될 수 있었다.
미군이 사라진 방콕 거리는 다종다양한 유럽인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에게 방콕만큼 안전하고 편안하고 값싸게 매춘을 즐길 수 있는 도시는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때를 맞추어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엔(円)을 앞세워 깃발을 휘날리며 방콕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난데없는 ‘섹스관광’ 소란이 벌어졌다. 유럽인들은 공공연하게 깃발을 들고 방콕과 마닐라에서 섹스관광에 나선 일본인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일본의 관광전문가들은 방콕이 미군에 의해 만들어진 섹스관광지라는 점과 영어를 못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인솔자를 따라 단체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그만큼 눈에 잘 띄는 것뿐이라며 항변했다. 그러나 방콕과 마닐라 등지에서 현지의 여성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이 반일시위에 나서는 등 비난이 이어지자 속수무책으로 ‘섹스애니멀’이라는 낙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럽과 일본의 차이는 분명 깃발 하나의 차이일 뿐이었다.
한편 태국의 친미 군부독재정권은 자신들의 수도가 거대한 윤락가로 변모하는 것에 대해 확고한 공범자였다. 미군의 공공연한 군사적 성매매가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전쟁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정권은 미군의 알앤알 정책을 옹호했고 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은 자국의 빈곤층 여성들을 무제한으로 외국군의 성적 노리개로 상납함으로써 점령지가 아니고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정치군인들은 직접 성매매 산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달러를 챙기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방콕의 성매매 산업의 배후에 태국 군부의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불과했다.
방콕-마닐라-도쿄-서울 그리고 한국인
1999년 태국 정부는 대대적인 성매매 단속에 나섰고 이듬해인 2000년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 세계를 겨냥한 ‘어메이징 타일랜드’ 캠페인을 시작했다. 섹스관광의 이미지가 자국의 관광산업은 물론 경제성장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인식의 결과였다.
그러나 어메이징 타일랜드식의 턴어라운드가 성과를 거둘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방콕의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한 한국인 관광객들은 그러한 회의를 입증하고 있으며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중국도 한 몫을 단단히 거들고 있는 형국이다.
태국이 ‘매춘’이라는 오명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명확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이 얻은 ‘섹스애니멀’이라는 오명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1970년대 일본인들에게 주어진 이 불명예가 온당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의 여성단체들과 지식인들은 일본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도 도쿄가 미군의 정액단지로 헌납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이 방콕과 마닐라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벌였던 섹스관광은 결코 용서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서울은 방콕, 마닐라와 더불어 일본인들의 3대 섹스관광지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한국은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었고 기지촌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지금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한국인들에게 방콕의 그 수많은 성매매 여성들을 모두 전쟁과 식민지의 고통에 신음했던 아시아의 딸, 우리의 딸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온전히 나의 과대망상일 뿐일까.
# by 노니타 | 2004/06/12 14:13 |
역사,문화,과학,교육 |
트랙백(1) |
덧글(3)